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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 아들을 제물로 바친 비정한 아버지?!

싸늘한 바람이 낯선 여행자의 목덜미를 움켜잡는다.
아버지의 무심한 눈길이 뒤따라오는 아들의 눈길과 부딪친다.
아버지의 눈동자 속에 깃든 깊고 깊은 암울함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아들을 할퀸다.
발가락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공포가
서늘하게 등줄기를 훑어 내린다.

고향집을 떠날 때 보여준 어머니의 절망에 찬 눈동자가
습기 찬 기억 속에 갈 길을 잃고 헤맨다.
3일 동안의 생소한 여행은 아들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아버지의 짐작할 수 없는 계획은 무서운 음모가 되어
아들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뒤돌아선 아버지가 천천히 아들에게 다가온다. 
멈춰선 아들의 발이 무심결에 뒤로 옮겨진다.
심각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조율은 아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아버지의 힘찬 걸음에서 살인자의 폭력이,
아버지의 굳센 주먹에서 도살자의 완력이,
아버지의 모진 눈길에서 살육자의 희열이 땅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아들을 향해 내리친다.
아들은 두려움에 눈을 감아버린다.

순간 따뜻한 온기가 목 주위를 감싸 안는다.
살그머니 눈을 뜬 아들의 눈에 자애로운 아버지의 온정이 보인다.
아버지는 스카프를 꺼내 아들의 목을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막아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아들의 볼을 쓰다듬고 다시 낯선 여행을 시작한다.

아버지의 연모가 담긴 스카프가 아들의 염려를 순식간에 녹인다.
아들은 익숙한 아버지의 등에서 암귀 여행의 공포를 잊는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결코...위험에 밀어 넣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갑자기 솟아난 신뢰는 지친 발걸음에 활력을 북돋아준다.

이젠 싸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움켜 잡아도
그들의 여행은 쉽게 멈추지 않을 듯 싶다.

<그림. 렘브란트/ 글. 나비잠>

<<순종의 대명사...아브라함>>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떠나라고 명령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창대하게 하여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얻을 거라고 언약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75살 때 그의 조카 룻과 무리를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부족사회에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그들은 친족끼리 함께 공동체를 이뤘고 공동체는 서로에게 안전과 보호를 맹세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조상의 유업과 소유를 버리고 적이 가득찬 미지의 땅으로 가라고 명령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신을 원망하고 신이 저주할까봐 무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수많은 세월을 허비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절대적으로 믿고 말없이 순종한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언약은 주종관계, 즉 군주와 가신들의 관계를 공식화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주종단계는 '사랑'이 아닌 '이기적 목적'에 의해 결합된다. 신하는 군주를 두려워하거나 이용하기 위해 계약을 하고 그 아래의 백성들은 지배당하거나 진압당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들과 또다른 주종관계에 빠진다. 많은 종교를 분석해 보면 신과 인간의 관계는 그런 '언약'을 기본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은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시'를 주기 때문이다.

 '계시'가 없는 삶은 인간세상을 혼란시킨다. '계시'가 없는 세상은 희망없는 삶과 동일하다. 생각해 보자. 원시적인 종교관에 기인하면 끔찍한 사건이나 최악의 불행이 닥치면 이것은 신들의 은총과 분노탓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리고 인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애쓴다. 하지만 신이 왜 화났는지 알기 못한다면 신의 분노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대부분의 종교적 신들은 그렇게 계시 없는 삶을 인간에게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분명한 '언약'을 제시했고 그 '언약'을 지키면 모든 행복을 소유하고 축복을 받을 거라고 약속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는 주님의 은총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축복인 준 놀라운 재산으로 인해 조카인 룻의 무리와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아브라함은  룻과 다투지 않기 위해 땅을 나누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룻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친절한 선택을 하게 한다. 아쉽게도 후에 룻은 '소돔과 고모라'의 주인공이 되는데...이 사건은 다음에....

 두 번째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대빵이 되게 하심을 믿었다. 그러나 아내가  90이 넘어 아이를 낳을 확률이 사라지자 근심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적인 결단에 따라 사라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바로 사라의 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아이를 얻게 된 것이다.

 종이었던 하갈은 임신을 하자 자신의 주인인 사라를 구박한다. 이로인해 아브라함에 의해 질타를 받게 된다. 도리어 하갈은 사라에게 학대를 받게 되고 이에 큰 슬픔에 빠져 도망친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 사라에게 복종하라고 말하며 하갈의 아이가 큰 민족의 대빵이 될 거라고 예언한다. 그렇게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게 된다.

 사실 성경은 일부다처제를 권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은 부인을 둔 경우는 많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들은 그로인해 큰 화를 당하게 된다.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이 서로 싸워 죽이거나 민족의 멸망에 관여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내를 단 한명.. 하와를 준 것처럼 인간에게 그 온전한 부부관계에 열중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게 쫓겨나는 사건과 이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이스마엘을 자신의 상속자로 인정한 아브라함.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천사 세 명을 보내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전해준다.

 아브라함은 믿기 어려운 전언에 할 말을 잃고 사라가 나이가 많고 생리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을 엿듣던 90이 넘은 사라도 어이없었다.

 그래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를 본 천사는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우겼다. 후에 사라가 낳은 아이의 이름은 '이삭'인데 이는 '웃음'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 세천사는 아브라함을 방문하고 룻이 있는 소돔을 향해 떠났다.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의 대명사로 불리우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90이 넘은 사라는 아이(이삭)를 낳았고 이에 분노한 하갈의 아이 이스마엘은 이삭을 놀렸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고 고했다. 아브라함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정해준 상속자는 이삭이었기 때문에 이스마엘과 함께 계속 있는다면...그들은 상속권을 위해 분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떠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상속자를 위해 낳은 아이 이스마엘.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믿고 있었을 것이다. 식량이 다 떨어져가 목마름에 죽어갈지라도...분명 주님이 구해주실거라는 믿음...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하나의 민족을 창출하게 한다. 성경학자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을 아랍민족으로 이삭의 후손을 이스라엘(유태인)으로 규정짓고 있다. 어쨌든 아브라함의 어리석음이 두 민족의 끊임없는 다툼을 탄생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이삭이 나이가 들자 아브라함에게 명령한다. 이삭을 하나님의 제물로 바치라고... 몇몇 성경학자들은 그 당시 가나안 세계관에서는 신이 생산한 것의 일부를 요구할 자격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를 비롯한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의 식민지들에서 발견한 문헌들을 보면 지속적인 풍요를 보장받으려는 방편으로 유아제사의식이 묘사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의 미신적 행위였다.

 하지만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 또한 왜 아브라함은 아무런 질문도 없이 이삭을 제사로 드렸을까? 때로는 일부 성격학자들이 아브라함이 뒤늦게 난 이삭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큰 것 같아 시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설명하려는 어리석은 오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가까운 곳에서 제사드리게 하지 않고 3일동안 걸리는 곳으로 보내 제사드리게 했다. 아브라함은 3일동안 자신의 자식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끊임없이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결코 자신에게 불행을 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어떡했을까? 계시로 언약을 통해 말씀해주신 것처럼 단지 순종과 충성을 바치면 슬픔은 닥쳐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 3일도 여느날처럼 변함없이 하나님께 축복받은 날이었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주저없이 하나님께 순종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삭은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없다고 궁금해 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은 주님이 주실거라고 대답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칼을 대려는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말렸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한 줄을 믿는 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숫양을 보내 번제에 쓰이도록 했고 아브라함은 정상의 궤도에서 만난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게 됐다.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신뢰가 절대적인 순종을 낳은 순간이었다.

 

<사진은 구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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