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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상식

미친 광기의 화가....최북[崔北]

어느 벼슬아치가 한 초라한 화가를 앞에 두고 꾸짖고 있었다. 내가 그림 부탁한 것이 언제인데 이제까지 붓끝 하나 놀리지 않았느냐는 둥,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토록 오만 하느냐는 둥 별별 말로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런말을 듣던 그화가는 벼락 같이 화를 내며 옆에 있던 송곳을 들고 소리쳤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깔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 버리는구나”하며 들고 있던 송곳으로 한쪽 눈을 서슴없이 찔렀다. 이에 눈에서 피가 철철 흐르자, 그벼슬아치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래서 그는 눈 한쪽이 멀어 늘 한쪽 눈에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고, 세상 사람들은 이같은 행동을 보고 광생狂生이라 지목하였다.
-이야기 인물 한국사 / 이이화-
 
어느날 최북은 금강산 구경을 갔다. 구룡연의 경치가 도취되어 술을 진탕 마시고 심하게 취하여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는 말이 최북은 천하의 명인이니 천하의 명산에서 죽겠노라 하더니 못속으로 뛰어들었다.그 때 동행한 사람들이 황급히 물 속에 뛰어 들어 그를 구한다음 산아래 반석 위에 눕혀 놓으니 한 동안 헐떡거리며 누워 있었다. 헐떡거리던 그가 갑자기 일어나 온 산이 울리도록 큰소리를 지르니 그 소리가 숲을 울려 수림속에 살던 까마귀가 모두 날개를 치며 날아가 버렸다.
-이야기 인물 한국사 / 이이화-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달라고 청하였는데,최북은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아니했다. 그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칠칠이는 붓을 더닞고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아. 종이 밖은 모두 물 아니오“라고 하였다. 그림이 잘되어 득의작인데 주는값이 적으면 문득 화를 내며 욕하고는 그 그림을 찢어 없앴다. 반대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는데도 그림 값을 많이 주면 껄걸 웃으면서 주먹으로 그사람을 밀며 그림 값을 도로 주어 문 밖으로 내보내고는 다시 손가락질하며 ”저 녀석은 그림 값도 모르네“하고 하였다.
- 조선시대 화론 연구 / 유홍준 -
 
 
 
현감인 한 친구가 최북을 초대하여 동헌에 놓아둘 병품 그림을 청했다. 이에 최북이 돼지 한 마리를 현감에게 그려주자 노발대발했다. 최북은 “돼지는 누추한 우리에게 안주하고 궂은 먹이에 자작하니 그 아니 청빈하며 뜻이 서면 저돌하니 그 아니 기재가 매 우며, 만인에게 돈버는 돼지꿈을 주니 그 아니 인자한가”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 이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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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시절, 최북의 이름은 최식이었다. 그가 서른 살이 넘어 붙인 칠칠이라는 이름은 북 이라는 글자를 쪼개어 두 글자 칠칠(七七), 로 만든 최북의 작품이었다. 그는 그렇게 바보스러우면서도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영위한 화가였다. 
 
 
그는 신분이 낮아 큰 벼슬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유로이 세상을 살면서 조선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는 중국의 산수가 아닌 조선의 풍경을 그려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남종화풍'이라 하여 중국의 화풍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와 달리 조선의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린 그림을 '진경 산수화'라고 하는데 겸재 정선이 이런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고 최북 또한 점차 그 방법을 따라했다.
 
그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왜나라와 청나라까지 가서 수많은 문물을 보고 배웠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의 그의 그림을 사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그림 값이 들어오면 친구들을 술을 마시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최북은 자기가 스스로 눈을 찌른 뒤 애꾸가 되었다. 그는 한쪽 눈이 안보여 항상 반 안경을 끼고 그림과 시 공부를 하였으며 술을 좋아했고 나아가 놀기를 즐겨한 꾼이었다. 남공철南公轍(1760~1840)의 <금릉집金陵集>13권 ‘최칠칠전’에 하루 5~6되씩의 술을 마셨다 하였고 <금릉집>10권 ‘최북답’의 남공철이 최북에게 보낸 편지에 ‘술 한 동이 마시걸랑’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그는 말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취하면 광기와 호기를 부려 주광화사라 불리기도 했던 그는 왜 술을 마셨는가? 그의 행적으로 볼 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척박한 현실에서 세상을 깔보며 사는 촉매제로 술을 마셨으며 그림을 통해 그 고뇌를 표현했던 것은 아닌지? 이렇듯 최북은 시대의 모순과 고민을 외면하지 않고 술 그리고 그림과 시를 통해 자기의 주체성을 예술로서 표현했다.
 
최북이 그려 전하는 산수화 작품으로는 금강산의 〈표훈사도〉·〈금강산전도〉, 단양의 〈도담도〉, 가야산 홍류계곡의 〈산수도〉,제주의 〈해변기암도〉, 한강의 〈한강조어도〉등 여러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조어도〉·〈풍성야귀인도〉·〈공산무인도〉·〈수각산수도〉등의 그림에서 광기 있고 독특한 기법을 사용 자신만의 조형양식을 이룩하였다.
 
 
 
 
최북은 산수화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라고도 불렀고, 메추리를 닮았고 수리를 잘 그린다고 해서 ‘최순崔鶉’ 이라고도 불리어 왔으며, 눈동자는 고양이처럼 날카롭고 영모를 잘그렸다고해서 ‘최묘崔描’ 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호산외사》에는 최북은 삼, 물, 집, 나무를 잘 그렸다고 소개하고 그림을 그릴적에 ‘향을 피워 놓고 깊은 구상에 잠기곤 하여 마침내 자기 뜻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어서 밀쳐도 끔쩍하지 않으며 작은 절도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금릉집》 ’최칠칠전‘ 에는 최북의 산수를 심사정과 병칭하고 영모는 변묘(卞描)와 비겼다고 기록하고 잇으며, 《병세재언록》에는 ’화법이 근력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가느다란 픽획으로 대강 그림을 그려도 갈고리 모양이 아님이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현재 남아 전하는 최북의 작품은 대부분 산수화이나 화훼, 영모, 괴석도 등 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화훼화는 주로 매화, 맨드라미, 무 등을 작품의 소재로 하였고, 영모화는 용, 사슴, 소, 매, 꿩, 토끼, 메추리, 새, 게, 등을 소재로 하였으며, 괴속도는 바닷가의 기암을 소재로 하였다. 또한 〈기려행려도〉등 여러 작품에서 인물이 자주 나타나는데 화면 속의 인물 묘사보다는 산수에 비중을 두어 자연을 보여 주는데 치중한 것으로 보인다.
 
 
 
어디에서 죽었느냐 에도 <금릉집>에는 ‘서울여곤에서 죽었는데 그 해가 어느 해인지 알 수 없다.’하였으며, 신광하의 『최북가』에 ‘성 모퉁이에서 쓰러져 눈 속에서 죽었다.’고 언급되었을 뿐 자세히 전하는 기록은 없다.
 
 
 
 
 
 
* 나비잠중얼거리다
- 요즘 일때문에 우리나라 위인에 대해 수많은 글을 읽게 됐는데..나비잠의 어린시절에 비해 반전의 위인이 많다.. 이를테면...청렴결백의 표징이었던 황희는 뇌물을 너무 많이 받아 세종이 그만 좀 하라고 했고....과학문명의 선구자였던 이천또한..뇌물로 집안이 망했음에도 자신도 뇌물을 포기하기 못하고...그 중...최북이라는  화가....참으로 재미있어 그 생을 올려본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의 반 고흐라고...많이 이야기하는데..반 고흐라 하기에는 너무..적극적이고..너무 극단적이라...너무....나비잠....스타일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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